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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조선뽕이다. 부제:조선국은 전기, 후기 가리지 않고 번영, 융성했다.jpg
2023-10-05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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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세상의 모든링크 링크모음 주소모음 링크짱!!</p>
<br><br>중국 정복왕조인 여진족의 청나라의 제 6대 황제인 고종 곧 건륭제가 자신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761년경에 어명을 내려 제작 및 편찬한 이른바 만국내조도 입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한국문명의 조선국 입조 사신단이 제일의 반열에 서서보시다시피, 당연히, 조선국 입조 사신단이 제일의 반열에 서서 만국의 입조 사신단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영길리국(영국), 법란서국(법국, 불국 곧 프랑스), 소서양국 내지 서반아국(스페인), 대서양국(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들), 화란국(네덜란드), 합륵미제아성 포함 열이마니아국(하노버 공국 포함 독일의 여러 도시국가들), 서국(스웨덴) 등 유럽문명권, 노미국 내지 아리만국(터키의 오스만 터키 추정), 서양쇄리 내지 천축(인도)까지 모두 청나라에 대대로 입조해 섬겨왔음을 잘 알 수 있겠습니다.<br><br><br>청나라의 제 6대 황제인 고종 곧 건륭제가 자신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763년경에 어명을 내려 제작 및 편찬한 황청직공도 입니다. 보시다시피, 조선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오랑캐 백성(인민, 국민)이라는 뜻의 이인(夷人), 오랑캐 부인이라는 뜻의 이부(夷婦)라고 호칭했지만, 오직 조선국만큼은 중국의 명나라가 조선국에게 그랬듯, 청나라 역시 청나라 내복(청나라 국내)와 똑같이 하여 문명국(선진국) 백성이라는 의미의 민인(民人), 문명국의 부인이라는 뜻인 민부(民婦) 곧 조선국민인, 조선국민부 이렇게 호칭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애초에 조선국이 황청직공도에서 가장 앞 곧 제일의 반열에 배석된 나라이기도 하니 말 다한 것이지요. 청나라 제 6대 황제인 고종 곧 건륭제가 영국의 매카트니 곧 조지 매카트니를 중심으로 한 영국 입조 사신단이 특혜를 간청했지만, 영국같은 오랑캐 국가들은 영국 뿐만이 아니니, 필요 없으니 거절한다는 서계를 답변으로써 하사해줬던 것을 고려하면, 조선국과 영국의 국제적 위상이비교될 수 밖에 없지요.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이지요.<br><br>그런데1780년 조선 사신(조선 입조 사신)이 건륭제의 고희연에 참석한 이후 조선 사신들은 이전보다 후한 대우를 받기 시작합니다.정월 초하루에 태화전에서 열리는 신년 축하 행사인 하례에 참석하러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조선에서는 동지사라고 불렀는데,1782년 신년 하례에 참석한 동지사는 황제가 주재하는 세 개의 큰 연회에 참석하게 됩니다.이전까지는 사신으로 가도 먼발치에서 황제를 볼까말까 하는 상황이었는데,이때부터10여 차례 이상 황제와 같은 공간에서 불꽃놀이도 보고,연등 축제,잡기 경연 등을 보게 된 것입니다.이러한 대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6부의 요즘으로 치면 차관도 들어가지 못하는 정월 대보름 정대광명전 연회나 귀족이거나 혈족 관계가 있는 신하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에 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1784년부터는 만주인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섣달그믐의 연회인 제석연에도 참석하게 됩니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br>김(金) 역관이 또 묻되,<br>“소방(小邦)의 진공(進貢) 방물을 이미 특은(特恩)을 입어 머물게 하였는지라, 예부로부터 마땅히 자문(咨文)을 지위(知委 하달하여 알림)하여 하랴?”<br>기 상서가 말하기를,<br>“마땅히 귀국에 자문할지라. 이전에 이러한 일이 있으면 먼저 기별이 나간 후 본국 자문을 기다려 들이고 머물러 후차 방물에이순하더니, 이번은 네 가지 방물을 다 황지를 받들어 특별히 머물러 이순하게 하니, 이 또한 격외(格外)에 진념(軫念) 하심이라.”<br>김 역관이 또 말하기를,<br>“들으니 27일 전은 황상이 하례를 받지 아니하신다 하나,속방의 대국 섬기는 정성으로써 금년 진공 방물을 또한 전례대로 나아오리로다.”<br>기 상서가 말하기를,<br>“《좌전(左傳)》에 일렀으되 ‘손이 예(禮)를 두매 주인이 갈린다.’ 하였으니, 이는 주인이 정하지 못할 일이로다.”<br>이 밖에 또한 여러 말이 있으되, 다 한만한 수작이라. 김 역관이 가기를 고하여 말하기를,<br>“감히 오래 수응(酬應)함으로 수고하시게 할 수는 없으니, 작별을 청하노라.”<br>기 상서가 말하기를,<br>“먼 나라 손님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 얻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 조금 오래 말하나 피곤함을 깨닫지 못하노라.”<br>하고 만류하여 말하기를,<br>“내 일찍이 이르되, 조선은 다른 외국과 다른지라,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봉하였으니, 만일 본래 중국 땅이 아니면 어찌 기자로 하여금 임금을 삼아 두었으리오. 내 항상 귀국 사신으로 창화(唱和)하며 수작하면서, 능히 외국이라 하여 간격을 두지 아니하노라.”<br>김 역관이 말하기를,<br>“대국이 속방 보기를내복(內服)과 같이 하는도다.”<br>기 상서가 말하기를,<br>“귀국이 본조에 신복함을 가장 먼저 한지라. 이로서 귀국을 으뜸을 삼으니, 이러므로 조정이 대접하는 예모가 특별할 뿐 아니라, 본국이 또한 공근함을 황상이 익히 아시는 일이니라.”<br>김 역관이 말하되,<br>“이번에 전례 밖에 한 가지 상을 더 주심이 또한 특은(特恩)이라 감축(感祝)함을 어이 측량하리오.”<br>기 상서가 말하기를,<br>“상 주는 물건은 예부터 다른 외국에 비겨 특별히 두터울 뿐 아니라, 다른 외국은 한 날 반상(頒賞)하고 오직 귀국은 홀로 딴 날을 정하여 반상함이 또한 다른 외국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함이니라.”<br>김 역관이 말하기를,<br>“더욱 감황(感惶)함이 간절하노라.”<br>김 역관이 또한 묘호(廟號)를 물으니, 기 상서가 말하기를,<br>“이미 고종(高宗)이라 하였으니, 본디 마땅히 고조(高祖)라 일컬을 것이로되, 고종이라 함은 황상의 뜻을 준행함이라.”<br>하더라 하고, 필담하던 종이를 가져다 뵈니, 기균이 나이 80이로되, 필획이 정하여 노필(老筆)인 줄 깨닫지 못하며, 말을 주고받음이 자세한지라. 이같이 대강을 기록하노라.<br>-고전번역서>연행록선집>무오연행록>무오연행록 제5권>기미년(1799년)<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이번에 십행(十行)의 조유(詔諭)를 1만 리나 떨어진 동방에까지 보내주셨는데 처음 즉위하신 때부터 융숭하게 예우해 주셨으므로 온 나라가 목을 빼고 축하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복(內服)과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어 8일 동안 파발로 달려 전해주게 하신 일을 다행히도 직접 보게 되다니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이만큼 성대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1795년)11월 21일 무진 3번째기사<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황제(청나라 제 6대 황제인 고종 곧 건륭제)가 우리나라(조선국, 당시 임금은 정조)에 대해 대우하는 것이 조금 자별(自別)하여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성문들 중 하나) 안팎의 여염 사이에 고려황제(高麗皇帝)라는 속어가 있기까지 합니다. 이 때문에 그곳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조선국의> 역인(驛人)이나 쇄부(刷夫)들도 이러한 물정을 익히 알아 기세를 부려 저(청나라인)들을 대하려고 하는데도 저들이 반드시 물러나고 움츠려 모두 삼가고 피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館)에 머물 때 또 방비하고 보호하기를 매우 충실히 하여 일마다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또한 연전에 화재가 나고 사람이 압사하는 등 여러 가지 사단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인들이> 더욱 감히 방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일성록(1780년경 기록).<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심지어는 청나라의 제 6대 황제인 고종 곧 건륭제가 조선국에 대해 대우하는 것이 특별해서, 청나라내에서 건륭제를 두고 고려(조선)황제라는 속어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청나라 관리들이 조선국 입조 사신단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되려 이를 조선국 입조 사신단 인원들이 악용해서, 조선국 입조 사신단의 역인이나 쇄부들이 기세를 부려 청나라인들을 대하려고 하는데도 청나라 관리들이 반드시 물러나고 움츠려 모두 삼가고 피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br>‘지금 천하에 강하고 크기를 말하면 조선이마땅히 중원 버금이 되고, 예의로 말하면 조선이 마땅히 으뜸이 될 것이다’-사양재 강호보의 연행록인 상봉록 에 기록된 유구국(류큐국, 현 오키나와)이 자국에 표류한 조선인들을 그들의 본국(조국)인 조선으로 귀국시키면서 한 말(1728년경).유구국이 조선국을 만방의 우두머리로 섬긴 게 만국진량의 종으로 교차검증되네요.jpg (etoland.co.kr)<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유구국은 기원후 1728년경때도 변함없이 조선국 후기때에도 천하에 강하고 크기를 말하면 조선국이 마땅히 중원(중국, 당시 여진족의 중국 정복왕조인 청나라) 버금이 되고, 예의(문물의 질적 수준)로 말하면 조선국이 으뜸이라고 언급하였을 정도이지요. 이는 유구국이 기원후 1458년경에 주조한 만국진량의 종(조선국을 가장 먼저 설명함은 물론, 조선국의 우수함을 유구국에 가져다 놓았다고 언급했는데, 중국의 명나라와 일본국[왜국]은 조선국보다 뒤에 설명함은 물론, 그저 밀접한 관계라고만 언급했지요.)의 문구만 봐도 교차검증이 되지요.<br>○김명국(金明國)의 호는 연담(蓮潭)이다. 그의 화법은 이전 사람의 수법을 답습하지 않고 일반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하였다. 작을수록 더욱 묘하고 클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역량이 웅장하고 짜임새가 역시 넓었으나 다만 그의 화법이 기묘한 데에 치우치고, 기세만 숭상하여 자못 주도 면밀한 묘미가 모자랐다.성질이 호탕스럽고 술을 잘하여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술을 요구하였는데 취하지 않으면 재주를 다 쏟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취해 버리면 그 공교로움을 다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뛰어난 것과 졸렬한 것이 서로 섞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화가의 적(賊)이라고 나무라기도 하였다.○ 명국(明國)이 통신사를 따라서 일본에 갔더니 온 나라가 물결일듯 떠들썩하여 명국의 그림이라면 한 조각의 종이도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여겼다. 한왜인이 곱게 삼간(三間) 집을 지어 사방 벽을 모단(毛緞)으로 바르고 천금을 폐백으로 하여, 명국을 맞아 벽화 그리기를 청하였다. 명국이 술을 굉장히 마셔 취한 다음 비로소 붓을 찾으니,왜인이 금가루 즙을 한 주발을 받들어 주었다. 명국이 그것을 받아 한입 가득히 머금고 벽의 네 모퉁이에 뿜어서 그릇이 다 빈 다음에 중지하니, 왜가 놀라고 성내어 칼을 뽑았다. 명국은 크게 웃으면서 붓을 잡고 휘두르니 산수와 인물이 그려져가는데 손놀림에 따라서 저절로 이루어졌다. 필세(筆勢)가 힘차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니 아마 평생의 역작이었다.왜인이 놀라고 기뻐하며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 자손에 전하고 지키게 하니, 마침내 그 나라의 기관(奇觀)이 되었다 한다.《청죽화사》<br>글씨와 그림을 청하는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박지영(朴之英)ㆍ조정현(趙廷玹)ㆍ김명국(金明國)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심지어김명국은 울려고까지 했다.왜인들이 전영(全榮)의 서법(書法)을 가장 귀중히 여겼다.<br>-해사록.<br>“이번에 글씨를 요구한왜인은 어떤 사람인가?”<br><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집정(執政)으로- 원문 빠짐 -우리나라를 비호하는 자입니다.”<br>하자, 상이 이르기를,<br>“일본에는 집정이 몇이나 되는가?”<br><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 원문 빠짐 -4인이 있는데, 지금은 거행(車行) 집정 3인을 포함하여 모두 7인이라고 합니다.”<br>하였다. 상이 이르기를,<br>“집정은 대신인가?”<br><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관백(關白)은 장군이라 칭하는데 집정은 바로 관백의 대신입니다.”<br>하였다. 상이 이르기를,<br>“경이 일본에 갔을 때도 저들이 글씨를 받은 일이 있었는가?”<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받았습니다.”<br>하였다. 상이 이르기를,<br>“글씨를 받은 종이는 어떠했는가?”<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모면지(毛綿紙)였습니다.”<br>하였다. 상이 이르기를,<br>“지금 글씨를 요구하는 일을 홍희남(洪喜男)은 어찌 진작 말하지 않았는가?”<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전에- 원문 빠짐 -있었습니다.”<br>하였다. 임광이 또 아뢰기를,<br>“일본은서화를 몹시 좋아합니다. 신이 사명을 받들었을 때 비록 일행의- 원문 빠짐 -모두 다투어 받았습니다.”<br>하였다. 상이 이르기를,<br>“이는 그 나라가서화를 숭상해서 그런가?”<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학문을 숭상하는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 신이 갔을 때 여덟 살 된 아이가 자신이 쓴 글씨를 보여 주었는데 역시 매우 기특하여 신이 칭찬하고 상을 주고는 일행이 가지고 간 붓과 먹을 주었더니 그 나라 사람들이 듣고는- 원문 빠짐 -앞 다투어 뇌물을 주고 글씨를 요구하였습니다.”<br>하니, 상이 이르기를,<br>“그렇다면 그 나라는 글씨를 모르는 것이다.”<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그 나라의 학문은 차서가 없고, 서법을 배우는 데에도 법첩(法帖)이 없었습니다.”<br>하였다. 상이 이르기를,<br>“일본은 자고로 병화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태곳적 유물도 자못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글씨를 받는가?”<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오래된 〈모시(毛詩)〉가 있다고 하는데 자세히 물으니 고본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빼앗아 간 판본이라고 합니다.”<br>하고, 또 아뢰기를,<br>“우리나라의 《동사보감(東史寶鑑)》도 가지고 들어갔다고 합니다.”<br>하였다. 상이 이르기를,<br>“경이 보기에 왜국의 정황은 어떠하던가?”<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그때 벌어진 특별한 정황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역관배들의 말을 들으니 놀라고 염려할 일은 없는 듯합니다.”<br>하였다. 상이 이르기를,<br>“지금 글씨를 받으려는 일이 과연 진심인가?”<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크게 욕심내는 것이서화입니다. 전일에 사명을 받들었을 때 글씨를 잘 쓰는 자 2, 3인을 대동하고 갔더니 글씨를 받고자 하는 자들이 심지어 고두(叩頭)하면서 청하였습니다. 그 나라가 글씨를 좋아하는 것을 알 만합니다.”<br>하였다. 상이 이르기를,<br>“우리나라의 글씨를 어떻게 여기던가?”<br>하니, 임광이 아뢰기를,<br>“저들은 글씨의 품격을 알지 못하여 좋건 나쁘건 가리지 않고 다 받습니다.”<br>-승정원일기>인조>인조 16년 무인>1월 29일주강을 행할 때 동지사 이목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한 뒤왜인이 글씨를 요구한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br>일본 관백(關白) 원길종(源吉宗)이 새로 즉위하여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 평방성(平方誠)으로 하여금 사자(使者)를 보내어 동래 왜관(東萊倭館)에 와서, 새 임금이 나라를 이어 받았으니 예전처럼 국서(國書)를 받들고 와 이웃간의 친목을 표시하기를 청하므로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호조 참의(戶曹參議) 홍치중(洪致中)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황선(黃璿)을 부사(副使)로, 병조 정랑(兵曹正郞) 이명언(李明彥)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어서(御書)ㆍ예물(禮物) 및 사행(使行)의 요좌(僚佐)ㆍ기인(技人)ㆍ역부(役夫) 등 데리고 갈 인원수는 임술년의 전례에 준하도록 하였다. 이 행차에서 세 사신은 각기 군관(軍官), 서기(書記), 의원(醫員)과 특별히 제술관(製述官) 한 사람을 두었다.선묘조(宣廟朝)로부터 통신사를 보낼 때에는 국가에서 일광산(日光山)에 치제(致祭)하는 전례(典禮)가 있어 문신(文臣)인 독축관(讀祝官) 두 명이 향축(香祝)과 제의(祭儀)를 받들고 종사관(從事官)과 같이 한 배에 타도록 하였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가 일찍이 뽑혀가 그 나라의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시와 글솜씨를 보여줌으로써 명성이 대단히 높아지자 그 나라 사람들의 기뻐하고 우러르는 바가 되었었다. 그 뒤 1백여 연간은 통신사가 갈 적마다 반드시 조정 선비 중 문장에 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독축관 겸 제술관(製述官)이라 이름하여 일행(一行)의 글에 관한 직무를 맡게 하였었다.임술년에 사신이 갈 때에 이르러 비로소 일광산의 치제(致祭)를 폐지하였기 때문에 독축관이라 하지 않고 제술관이라 하였다. 왜인들의 문자(文字)를 즐기는 취미가 근래에 더욱 왕성하여 부러워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이루었고학사대인(學士大人)이라 부르면서 시(詩)와 문(文)을 청하느라 거리가 메이고 문이 막힌다. 그들의 말에 수응하거나 우리나라 문화를 선양하는 문제를 반드시 제술관에게 책임 지우게 되니, 일은 번잡하고 책임이 크다.<br>-신유한의 해유록(1719년경).<br>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의 시와 문을 구하여 얻은 자는 귀천과 현우를 묻지 아니하고 우러러보기를 신명같이 하고, 보배로 여기기를 주옥처럼 하지 않음이 없다. 비록 가마를 메고 말을 모는 천한 사람들이라도조선 사람의 해서나 초서를 두어 글자만 얻으면 모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감사의 성의를 표시하며, 소위 문사라 하는 자는 천릿길(천리길)을 멀다 하지 아니하고 와서 역이나 관에서 기다려서 하룻밤 자는 동안에 혹은 종이 수백 폭을 소비하고 시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는 자는 비록 반 줄의 필담이라도 보배로 여겨 감사해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대개 그들이 정화로운 땅에 생장하였으므로 본래 문자를 귀중히 여길 줄 알기는 하나 중국과는 너무 멀어서 평생에 의관의 성한 의식을 모르고, 평소에 조선을 높이 사모하는 이유로 그 대관의 귀인은 우리의 글을 얻어서 자랑거리로 삼고, 서생은 명예를 얻는 길로 삼고 낮고 천한 자는 구경거리로 삼아서 우리가 글을 써준 뒤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어 달라고 청하여, 진적인 것을 증명하므로 매양 이름난 도회지나 큰 고을을 지날 때에는 그들을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었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신유한의 해유록(1719년경).<br>東曰是則然矣。但今諸從者。有呼敝邦人。必曰倭人。亦非所望。동(東)이 말하길,"그것은 그러합니다. 다만 지금 여러 종자(從者)들이 폐방 사람을 부를 때 반드시 왜인이라 하니 또한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余曰貴國之有倭名已久。君何所憾。내가 말하길,"귀국은 왜(倭)라 불린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애달파 하십니까?"<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東曰唐史旣云倭。改國號爲日本。今後則願飭下輩。呼我以日本人可矣。동(東)이 말하길,"당사(唐史 , 당나라 역사서)에 이미 이르길, 왜가 국호를 고쳐 일본으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금후로 바라건대 아랫사람들에게 우리를 일본인이라 부르도록바로잡아 주심이 옳습니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余又問貴國人呼我曰唐人。題我人筆帖曰唐人筆蹟。亦何意。내가 또 묻길,"귀국 사람들은 우리를 당인(唐人 , 당나라 사람)이라 부르고 우리의 필첩(筆帖)을 당인(唐人)의 필적(筆蹟)이라 하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東曰國令則使稱客人。或稱朝鮮人。而日本大小民俗。自古謂貴國文物。與中華同。故指以唐人。是慕之也。동(東)이 말하길,"국령(國令)으로는 객인(客人)이라 일컫고 혹은 조선인이라 일컫게 하였으나 일본의 크고 작은 민속이 예로부터 귀국의 문물이 중화(中華)와 더불어 같다고 하여 이르는 것이니 당인(唐人)이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모한다는 것입니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귀국[조선국]의) 여러 종자들이 우리나라(일본국[왜국]) 사람들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왜인(倭人)이라고 칭하던데, 또한 평소에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귀국이 왜라는 칭호를 가진 지가 이미 오래인데 군이 무슨 유감입니까?" 하니, 우삼동(아메노모리 호슈)이 말하기를, "당사(唐史)에 이미 이르기를, 왜가 국호를 고쳐서 일본(日本)이라 하였다. 하였으니, 이 뒤에는 원컨대 하인들에게 신칙하여서 우리를 일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내가 또 묻기를, "귀국 사람이 우리를 당인(唐人. 당나라 사람)이라 부르고, 또 우리나라 사람의 필첩에 쓰기를 당인의필첩(筆帖)이라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하니,우삼동이 말하기를, "국가의 명령으로는 객인이라 칭하고 혹은 조선인이라 칭하도록 하였으나 민속이 옛적부터 귀국(조선국)의 문물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당인이라고 칭한 것이니, 이는 (조선국을)사모(思慕. 우러러 받들고 깊이 따르다.)하는 것입니다."하였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신유한의 해유록(1719년경).<br>일본국(왜국)은 대대로 훗카이도~쿠릴열도에 거주하는 아이누족은 새우 오랑캐라는 의미인 하이, 유구국, 동남아시아~남태평양권, 유럽문명권은 남방의 벌레(버러지)같은 오랑캐라는 의미인 남만 이렇게 불렀지요. 유럽문명권은 특히 양놈 오랑캐라는 의미인 양이 이렇게도 불렀구요. 그러나 조선국은 문물이 중화와 질적 수준이 같다는 의미로써 당나라, 조선인을 당나라 사람이라는 의미의 당인 이렇게 불렀지요. 실제로 당인두부, 당인의 필첩, 당인신사, 당인옥 문집, 당인 나오기 등 사례가 대단히 많지요.<br>장기진(長崎鎭)에 머무른 지 3개월이 되었으므로 그곳 사람들과 친해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중에는 때로 왕래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일본 풍속에 남녀 할 것 없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매우 흠모하여 평범한 뱃사람이라도 왜인들이 다투어 초대하고, 그 집에 이르면 술과 음식을 권하여 다정하고 성의가 있어서 중국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모두 대답하기를 “조선은 부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그 나라가 우리나라를 흠모함이 예부터 이와 같았다고 한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평소에는 모두 꿇어앉았는데 남녀노소가 모두 그러하였다. 비록 밥하는 계집종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꿇어앉아 불을 지폈다. 그러나 남녀 구별 없이 본국인 타국인 할 것 없이 함께 섞여 앉아도 조금도 부끄러워함이 없었으니, 그들이 서로 화간(和奸. 성관계)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간통하고자 하였는데, 하천(下賤)의 여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에 와서 남녀의 성기 등을 말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농담하는 것이 극도로 심하였다. 들으니, ‘왜녀(倭女)가 우리나라 사람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나라에서 지극히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왜녀들이 반드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자 한다. 그 사람들은 이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정을 통하면 그 여자가 스스로 관부에 가서 말한다. 관부는 국왕에게 보고하고 출산할 달수를 계산하여 아이를 낳으면 관에서 돈을 준다.’ 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돌아올 때 부산진에 도착하자 관리가 “이번에 표류인 중에서 일본에 들어가 간통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어떤 사람이 어떤 여자와 정을 통하였는데 그 여자가 관에 보고했다’는 내용이 도착했다. 이것이 만약 위의 감영에 보고되면 즉시 이물통간죄異物通奸罪로 다스려질 것이니 만 번 죽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어찌 차마 죽일 수 있겠는가. 아래서부터 미봉彌綘하여 그 말을 없애 버리겠다.”라고 하였다. 그 여자가 스스로 관에 보고한 것이 과연 거짓이 아닐 것이다.<br>❖ 왜인은 우리나라를 매우 흠모하였기 때문에 제주 사람이 혹시 표류해 오면 그 털모자(氊笠)와 엉성하게 만든 사발을 모두 귀중한 물건으로 보관해 두었다. 작년에 정의 현감(旌義縣監)이 체귀(遞歸)하다가 표류하여 왔을 때 이곳에 도착하여 일곱 달 동안 조선관에 머물렀는데 그가 쓴 붓글씨를 가지고 왜인들이 모두 족자(簇子)를 만들고 비단으로 장식하였다.대마도(대마주, 쓰시마)에 도착했는데 물길 480리였다. 대마도 풍속은 지극히 교묘하게 속여서 일본과 달랐다. 표류한 사람의 옷과 음식은 본래 일본이 공급해 준 것인데 이것을 속여서 탈취하였으니 장기(長崎) 사람들이 대마도 사람들을 도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대개 이러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학일행(譯學一行)이 4월 그믐날 이후 대마도에 정박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본 것은 만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이니 그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어가 능하였다. 우리를 보러 온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도 조선인이다.”라고 하였다. 평소의 언어는 조선어와 일본어였으며, 한번도 일본을 본국이라 말한 적이 없었다. 대체로 일본과 다르며 일본의 순신純臣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도착한 후에 동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이며 그 사람들도 우리나라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마도 사람들이 와서 ‘나도 조선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br>-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1818년.).<br>조선국 통신사를 천사, 신선으로 섬겨온 일본국(왜국).jpg (etoland.co.kr)<br><br>조선국 통신사를 두고 황화사로 섬긴 일본국, 유구국.jpg (etoland.co.kr)<br><br>조선국의 최전성기가 제 4대 임금인 세종조가 아닌 제 9대 임금인 성종조부터인 이유.jpg (etoland.co.kr)<br><br>조선국의 전기, 후기 포함 우리 한국문명사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종합 정리:일국지하 만국지상, 한중문명일체화. (etoland.co.kr)<br><br>일본국(왜국)은 이렇게 중국인보다 조선인들을 훨씬 더 우대하였을 정도였는데, 그 이유는 조선국의 부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였지요. 유구국의 대조선관과 비슷한 느낌이였다고 보시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min-width: 0px; max-width: 100%;">일본국에서 조선인을 매우 귀중하게 여겨왔기 때문에, 일본인 여성 곧 왜녀들이 반드시 조선인들과 동침하여서 조선인의 아이를 임신하려고 했는데, 왜녀가 조선인 아이를 임신한 것을 관부에 알리면, 그 관부가 중앙정부인 에도 막부에 알리고, 에도 막부가 출산할 날짜를 계산해 관부를 통해 알려줄 정도였다고 하죠. 한마디로 일본국에서 에도 막부 시대에 이르기까지에도 조선인을 매우 귀중하게 여겨서 이른바 조선인 출산 장려 정책이 있기까지 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국이 중국(명나라), 여진족의 중국 정복왕조(청나라)와 더불어 동양문명권의 1등 내지 특등 문명국(선진국)으로 번영, 융성해왔기에 가능한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간혹 보면,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일본국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것마냥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과 분명히 다릅니다. 이들은 뭘 해도 여전히 남만, 양이 정도로 불려오는 것에 불과했고, 일본국이 가장 경외했던 선진국 곧 문명국은 심지어 중국도 아니고 다름아닌 우리 한국문명의 조선국이였습니다. 근현대사~현대사 초반부에 이 자리를 프랑스가 잠시 가져가서 일본국에서 이른바 파리 증후군이 돌도록 했다가, 다시 현 우리 대한민국이 한류를 통해 사필귀정을 해냈으니, 일본국 역사상 가장 큰 역할을 끼친 건 상대적, 시대 보정으로 견주어 보면, 조선국을 위시한 우리 한국문명이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상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소위 조선국의 전기, 후기를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이 조선뽕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니, 참조해주세요. ㅎ <img src="/data/daumeditor10/231001/thumbnail3/38471716961710880.jpg"><img src="/data/daumeditor10/231001/38471716961710881.jpg"><img src="/data/daumeditor10/231001/71539616961710501.jpg"><img src="/data/daumeditor10/231001/71539616961710502.jpg"><img src="/data/daumeditor10/231001/7153961696171050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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